동영상·포토 갤러리/고궁·사찰·박물관

경주 불국사(慶州 佛國寺)-[2]

Big_Man 2012. 11. 25. 22:22

경주 불국사(慶州 佛國寺)

 

 

 

 

 

 

 

 

 

 

 

 

 

▲ 불국사 범종각

 

▲ 불국사 범종각

 

 

 

 

▲ 보수중인 불국사 다보탑

 

 ▲ 불국사 다보탑 (출처: 문화재청)

 

불국사 다보탑 (佛國寺 多寶塔)

 

국보 제20호 (지정일 : 1962. 12. 20)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 불국사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석탑이다. 불국사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마당에 동서를 마주보며

동쪽엔 다보탑, 서쪽에는 석가탑이 나란히 세워져있다. 두 탑을 나란히 세운 까닭은 ‘현재부처인

석가모니불이 설법을 펴자 과거부처인 다보불이 옆에서 옳다고 증명했다’는 법화경의

내용에 따라 탑으로 구현했기 때문이다.

건립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된다. 이 탑은 1925년쯤에 일본인들에 의해

해체 수리되었는데, 이 때의 관련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고 탑 속에 있던 사리와 사리함 등

유물들도 모두 사라져버렸다. 기단 돌계단 위에 놓여있는 4마리의 돌사자도 한 마리만 남기고

모두 일제에 의해 약탈되어 지금까지도 행방을 알 수 없다.

탑의 구조를 보면 1층은 사각, 2층은 팔각이며, 3층은 원으로 변화를 주었다. 사면으로 계단을 놓은

기단 위에 추녀가 힘차게 올라간 사각 기와집 형식이며, 그 위에 연꽃잎 모양으로 창문을 낸 팔각정이

세워진 모습이다.

복잡한 목조건축의 구조를 산만하지 않으면서도 유려하게 표현하였는데, 8세기 통일신라 불교미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석탑으로 우리나라 탑 가운데 가장 개성적이고 아름다운 탑으로 평가된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과거·현재·미래의 부처가

사는 정토(淨土), 즉 이상향을 구현하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정신세계가 잘 드러나 있는 곳이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 짓지 못하여 그 후 나라에서 완성하여 나라의 복을 비는 절로 삼게 되었다.

다보탑과 석가탑(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국보 제21호)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10.4m로 같다. 절내의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 동서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동쪽탑이 다보탑이다. 다보탑은 특수형 탑을, 석가탑은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구현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석가탑을 보면 2단의 기단(基壇)위에 세운 3층탑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다보탑은 그 층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십(十)자 모양 평면의 기단에는 사방에 돌계단을 마련하고, 8각형의 탑신과

그 주위로는 네모난 난간을 돌렸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된다. 목조건축의 복잡한 구조를 참신한 발상을 통해 산만하지 않게 표현한 뛰어난 작품으로,

4각, 8각, 원을 한 탑에서 짜임새있게 구성한 점, 각 부분의 길이·너비·두께를 일정하게 통일시킨 점 등은

8세기 통일신라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안타깝게도 다보탑에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설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1925년경에 일본인들이 탑을 완전히 해체, 보수하였는데, 이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또한 탑 속에 두었을 사리와 사리장치, 그 밖의 유물들이 이 과정에서 모두 사라져버려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기단의 돌계단 위에 놓여있던 네 마리의 돌사자 가운데 보존상태가

가장 좋았을 듯한 3마리가 일제에 의해 약탈되어, 이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아직까지 그 행방을 알 수가 없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불국사 삼층석탑 (佛國寺三層石塔)

 

불국사 삼층석탑 (佛國寺三層石塔)

국보 제21호 (지정일 : 1962. 12. 20)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 15 불국사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이다. 불국사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에 동서로 동쪽에는 다보탑, 서쪽에는

석가탑이 세워져 있다. 나란히 세운 이유는 ‘현재부처인 석가불이 영취산에서 설법을 할 때 바로 옆에서

과거불이 다보불이 땅에서 솟아오르는 탑 속에서 석가불의 설법이 옳다고 증명했다’는 법화경의

내용을 탑으로 구현했기 때문이다.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같이 조성된 것으로 추측되며,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인데. ‘석가탑’이라고 하는 줄임말이 더 알려졌다. 1966년에는 도굴꾼들에 의해

탑이 손상되어 수리공사를 했는데, 그 때 탑 안에서 사리장엄구와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보 제126호)이 발견되었다.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웠다. 1층 몸돌(옥신석)과 2, 3층의 몸돌의 비율이 4:2:2로 완벽한

균형미를 보인다. 상륜부가 다소 어색해 보이는데, 이는 1973년에 남원 실상사탑의 상륜부를 그대로

본 떠 복원했기 때문이다. 감은사지삼층석탑(국보 112호), 고선사지삼층석탑(국보 38호)의 양식을

이어받아 8세기 통일신라시대 3층석탑의 전형을 보여주는 걸작이다.

‘석가탑’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고, 그림자가 비치치 않는다는 뜻의 ‘무영탑’이라고도 불린다.

석가탑을 조성하기 위해 서라벌로 온 백제석공 아사달을 찾아온 아사녀가 남편을 기다리다

연못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는 슬픈 전설이 서려 있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불국사 삼층석탑 (佛國寺三層石塔)

 

 ▲ 불국사 삼층석탑 (佛國寺三層石塔)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과거·현재·미래의 부처가 사는

정토(淨土), 즉 이상향을 구현하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정신세계가 잘 드러나 있는 곳이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혜공왕 10년(774) 12월 그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 짓지 못하여, 그 후 나라에서 완성한 후

나라의 복을 비는 절로 삼게 되었다.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과 경주 불국사 다보탑(국보 제20호)은 절의

대웅전 앞 뜰 동서쪽에 각각 세워져 있는데, 서쪽탑이 삼층석탑이다. 탑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으로, ‘석가탑’이라고 줄여서 부른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하는 것을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에 따른 것이다.

 

탑은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때 조성된 것으로 추측되며,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석탑으로, 경주 감은사지 동ㆍ서 삼층석탑(국보 제112호)과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8호)의 양식을 이어받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훌륭한 작품이다.

 

탑 전체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2층의 기단이 튼실하게 짜여 있으며, 목조건축을 본따서

위·아래층 기단의 모서리마다 돌을 깎아 기둥 모양을 만들어 놓았다. 탑신에도 그러한 기둥을 새겼으며,

지붕돌의 모서리들은 모두 치켜올려져 있어서 탑 전체에 경쾌하게 날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더한다.

 

1966년 9월에는 안타깝게도 도굴꾼들에 의해 탑이 손상되는 일이 있었으며, 그해 12월 탑을 수리하면서

2층 탑신의 몸돌 앞면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던 사각형의 공간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기서 여러가지 사리용기들과 유물을 찾아냈는데, 그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국보 제126호)이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로 닥나무 종이로 만들어졌다. 탑의 머리장식(상륜부)은

16세기 이전에 유실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1973년 남원 실상사 동ㆍ서 삼층석탑(보물 제37호)의

머리장식을 본따서 복원하였다. 탑 주위로 둘러놓은 주춧돌 모양의 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이를 부처님의 사리를 두는 깨끗한 곳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 탑은 ‘무영탑(無影塔: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탑)’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여기에는 석가탑을 지은

백제의 석공(石工) 아사달을 찾아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 온 아사녀가 남편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연못에 몸을 던져야 했던 슬픈 전설이 서려 있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불국사 삼층석탑 (佛國寺三層石塔)

 

 ▲ 불국사 삼층석탑 (佛國寺三層石塔)

 

▲ 불국사 대웅전/보물 제1744호

 

 

▲ 불국사 대웅전 불상 (佛國寺 大雄殿 佛像) 

 

▲ 경주 불국사 석조(慶州 佛國寺 石槽)

 

 ▲ 경주 불국사 석조(慶州 佛國寺 石槽)

 

불국사 석조 (佛國寺 石槽)

보물 1523 (지정일 : 2007. 09. 11)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진현동 13-5

 

통일신라시대의 돌로 된 물통이다. 백제시대의 석조는 주로 원형이나 통일신라 이후의 석조는 대부분이

직사각형 모양이다. 과거에는 그 안에 공양하는 연꽃을 심어두었다고도 하나, 정확한 쓰임새는 알 수 없다.

지금은 불국사 대석축 앞 광장 계단 옆에 놓여서 방문객들에게 식수를 제공하는 수조로 쓰이고 있다.

직사각형의 커다란 돌 내부를 파서 만들었다. 각 모서리가 둥글게 다듬어져 있고 안쪽으로 살짝 말려들어간

모양을 하고 있어 그 형태가 유려하다. 바깥면은 도드라진 돌림띠와 안상(코끼리 눈을 본 떠 만든 장식 문양)을

얕게 조각하여 장식하였고, 안쪽면 바닥과 옆벽면에 연꽃무늬를 새겼다. 돌을 이용한 것이면서도

투박하지 않고 경쾌한 멋을 지닌 석물로 신라인의 조형미를 보여주는 귀중한 유물이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불국사 비로전(佛國寺 毘盧殿)

 

비로전은 무설전 뒤쪽 높은 곳에 있으며 관음전 왼쪽 아래에 있다. 건물은 1973년 대복원공사 때

고려 시대 양식으로 지은 것이다. 비로전 안에는 통일신라 때 조성된 비로자나부처님의 형상인

금동비로자나불좌상(金銅毘盧舍那佛坐象/국보제 26호)이 모셔져 있다.

 

비로자나란 '빛을 발하여 어둠을 쫓는다'는 뜻으로, 여러 부처님 가운데에서도 가장 높은

화엄 불국의 주인이 되는 부처님이다. 비로전 앞뜰에는 석등과 비슷한 양식의 화려한

고려 초기의 부도가 전각 안에 보호되어 있다.

 

▲ 금동비로자나불좌상(金銅毘盧舍那佛坐象/국보제 26호)

 

 ▲ 불국사 무설전(無說殿)

 

경론(經論)을 강설(講說)하는 강당. 말로써 경론을 강설하는 곳임에도 무설(無說)이라고 한 것은

진리의 본질과 불교의 깊은 뜻이 언어 수단으로ㅅ써는 도달할 수 없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경지임을 표현한 것이다.


670년경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이 곳에서 최초로 강의를 하였다.

창건(創建)이후 여러차례 중건· 중수를 거쳐 1973년 복원하였다.

건축양식은 조선후기에 속한다.

 

 

 ▲ 불국사 관음전(佛國寺 觀音殿)

 

관음전은 비로전 동쪽 언덕위에 있다. 자비의 보살인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님을 모신 전당이다.

관세음보살님은 남쪽바다 가운데 솟아있는 보타락가산(補陀洛伽山) 중에서 한 쪽에 초록버들이

늘어져 넘실거리고 한쪽에는 푸른 대(竹)가 뻗어 올라 휘청거리는 경치좋은 곳에 자리잡고 계시면서

사람들이 도와달라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도와 달라는 소리를 듣기만 해도 곧 구원의 손길을 뻗치니

천 개의 손이 있고 천 개의 눈이 있다한다. 그래서 천수천안 관세음보살(千手千眼觀世音菩薩)이란 말이 있다.

 

비로전보다 높은 곳에 관음전이 있는 것은 보타락가산을 나타낸 것이다. 옛날에는 산모습으로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계단식으로 되어 산모양이 자연스럽지 못하게 되어있다. 산으로 오르는 계단을 낙가교라 부르고 있다.

낙가교(洛伽橋)란 보타락가산으로 오르는 계단이라는 뜻이다. 관음전으로 들어서는 문을

해안문(海岸門)이라하여 남해바다를 건너왔다는 뜻이다.

 

기록에 의하면 해안문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양편에 푸른 대를 상징한 취죽루(翠竹樓)와 능수버들을 상징하는

록양각(綠楊閣)이라는 누각이 높이 솟아 해안문과 사이에 행랑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복원되지 못했다. 관음전 앞에 있는 장명대(長明臺)는 관세음보살님의 지혜의 등불을 밝히던 곳이다.

 

 

 

▲ 불국사 사리탑(佛國寺 舍利塔)

 

 ▲ 불국사 사리탑(佛國寺 舍利塔)

 

보물  제61호(1963.01.21 지정)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 (불국사 경내)

 

고려시대에 건립된 사리탑으로 높이는 2.06m이다. 현재 불국사의 강당 뒤쪽 비로전 곁에 단칸의 보호각을

지어 보존하고 있다. 1905년에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1933년에 반환된 것으로, 지금의 위치는 원래의

위치가 아니다. 전체적으로 표면 장식이 아름답고 단아하며, 외형적으로는 석등과 비슷한데,

「불국사사적기(佛國寺事蹟記)」에 '광학부도(光學浮屠)'라 한것이 바로 이것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구조는 상대석 ·중대석 ·하대석 위에 옥신(屋身)과 옥개석(屋蓋石)을 놓았다.

기단부(基壇部)는 방형의 지대석(地臺石)위에 8각형의 기대석(基臺石)을 놓았는데, 각 면에는 상하로 테를

돌리고 그 사이에 안상(眼象) 1구씩을 조각하였으며, 지선(地線)에서는 꽃무늬 문양을 새겨 간지(間地)를

메우고 있다. 그 위의 복련석(伏蓮石)에는 소박하고 큼직한 단판연화(單瓣蓮華) 8잎을 새겼고,

중대석은 고형(鼓形) 표면에 구름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상대석의 하부에는 단판 연화 9잎을 돌렸고,

연판의 가운데에는 꽃 문양 형식의 원좌(圓座)가 있으며 상면에는 옥신 주위로 20과(二十顆)의

연자(蓮子)가 음각되었다.

 

옥신(屋身)은 배가 부른 원통형의 특이한 형태로 상하 방향으로 연꽃과 보상화문(寶相華文)의 기둥을 조각해

세워 네 부분으로 구분하였다. 각 면에는 얕은 불감(佛龕)을 만들어 그 안에 여래좌상(如來坐像) 2구와

보살입상(菩薩立像) 2구를 양각하였으며, 감실 상부에는 장막이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옥신 상부에는

하면에 연판이 돌려진 12각의 기와지붕을 본떠 만든 옥개석이 얹혀 있다. 옥개석은 추녀 끝에서 12각을

이루다가 정상을 향하면서 6개의 능선이 소멸되어 6각을 이루고 있다. 옥개석 하면에는 16판 연호가

중첩되었고, 옥개석 상면의 낙수면은 경사가 매우 완만하다. 옥개석 정상에는 낮게 6각형의 노반(露盤)이

놓이고 그 위에 횡대(橫帶)와 꽃 문양이 조각된 편구형(扁球形)의 복발(覆鉢)이 얹혀 있다. 한편 옥신 상부

중앙에는 지름 5cm의 둥근 구멍이 뚫려 옥개석을 관통하고 있는데, 이 구멍은 찰주공(擦柱孔)으로 생각되며,

 양련석(仰蓮石) 중앙에는 홈이 패어 있어 사리공(舍利孔)으로 추정된다.

 

현재 옥개석의 일부가 파손되었으며 석질이 연약해서 곳곳에 풍화현상이 있지만 비교적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으며 전면의 조식과 전체의 조화가 미려한 작품이다. 이 부도는 신라시대 석조 부도의 전형양식인

팔각원당형에서 벗어나 특이한 형태를 보여주는 것으로 전체적인 조형과 조각수법으로 보아 신라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 불국사 사리탑(佛國寺 舍利塔)

 

 

 

 

 

 

(촬영 : 2008년 10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