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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해미읍성(瑞山 海美邑城)

Big_Man 2012. 8. 21. 10:42

 해미읍성(海美邑城)조선시대의 읍성으로 해미읍의 중심지이자, 군사적 방어 요충지였다. 이 지역은 고려 말부터 왜구의 출몰이 잦아 피해가 막심했던 곳으로, 대책 마련을 위해 조선 태종 17년(1417)에 축조 사업이 시작되었고, 세종 3년(1421)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일제강점기를 지내며 폐허가 되었는데, 1974년에 동문과 서문의 복원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3곳의 문과 객사 2동, 동헌 1동, 망루 1개소가 옛 모습을 되찾았다.

또한 해미읍성은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곳으로, 개화기에 충청도 각 고을에서 잡혀온 천주교도들이 고문과 죽임을 당한 현장이 그대로 남아있다.


 

 

 

 

 

 

 

 

 

 

 

 

 

 

 

 

 

 

 

 

                                 ▲ 천주교 박해, 그 비극적 현장을 온몸으로 말하는 호야나무

해미읍성 안에는 300년 된 회화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충청도 사투리로 호야나무라고 불린다. 이 호야나무는 1866년에 병인박해라고 불리는 천주교 박해 사건 때 충청도 각 지에서 잡혀온 약 1천명의 신자들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고문을 당하고 처형까지 당한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동쪽으로 뻗은 나뭇가지에는 고문에 사용된 철사줄이 박혀있던 흔적이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또한 호야나무를 비롯해 신자들이 수감되었던 감옥터, 처형의 장소로 쓰였던 개천 돌다리판과 진둠벙등이 해미읍성에 그대로 간직되어 있어, 매년 수만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서산 해미읍성(瑞山 海美邑城)은 고려 말부터 국정이 혼란한 틈을 타서 왜구가 해안지방에 침입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바, 이를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하여 조선 태종17년(1417)부터 세종3년(1421) 사이에 당시 덕산(德山)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忠淸兵馬都節制使營)을 이 곳에 옮기고자 축성(築城)되었으며, 효종3년(1652)에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이 청주로 옮겨가기 전까지 230여 년간 군사권을 행사하던 성으로 있다가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이설되고 해미현의 관아가 이 성으로 옮겨졌으며,1914년까지 겸영장(兼營將)이 배치되는 호서좌영으로서 내포지방의 군사권을 행사하던 곳이었다. 해발 130m인 북동쪽의 낮은 구릉에 넓은 평지를 포용하여 축조된 성으로서, 성벽의 아랫부분은 큰 석재를 사용하고 위로 오를수록 크기가 작은 석재를 사용하여 쌓았다. 성벽의 높이는 4.9m로서 안쪽은 흙으로 내탁되었으며 성벽 상부 폭은 2.1m 정도이다. 성문은 동·서·남·북 4곳에 있는데 네모지게 잘 다듬은 무사석(武砂石)으로 쌓았으며, 주 출입구인 남문은 아치모양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읍성에는 동헌을 비롯하여 아사(衙舍) 및 작청(作廳) 등의 건물들이 빼곡히 있었으며,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유적도 일부 남아 있다. 1974년에 동문·서문이 복원되었고, 1981년 성내 일부를 발굴한 결과 현재의 동헌 서쪽에서 객사와, 현재의 아문 서쪽 30m 지점에서 옛 아문지가 확인되었고, 관아외곽석장기지(官衙外廓石牆基址)가 발견되었다. 성의 둘레에는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탱자나무를 돌려 심어서 탱자성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촬영 : 2012년 8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