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황사(芬皇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이다. 〈삼국사기〉에는 634년(선덕여왕 3) 정월에
창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는 석탑을 중심으로 남서쪽에 당간지주가 있고, 탑 북쪽에는
근래에 세운 보광전(普光殿)이 있다. 일찍이 원효는 이곳에 머물면서 〈화엄경소 華嚴經疎〉를 썼으며,
〈삼국유사〉에 의하면 솔거 가 그린 〈관음보살도〉가 있었고, 755년(경덕왕 14)에
강고내미(强古乃未)가 구리 30만 6,700근을 들여 약사여래상을 만들어 안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좌전(左殿)의 천수대비 벽화는 영험이 있어서 경덕왕 때 희명(希明)이라는
어린아이의 눈을 뜨게 했다고 전한다. 1101년(숙종 6) 숙종의 조서에 의해
한문준(韓文俊)이 화쟁국사비(和諍國師碑)를 건립했다.
그뒤 몽골 침입과 임진왜란 등으로 큰 손상을 입었다. 현존 당우로는 보광전·승당·종각이 있으며,
이밖에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국보 제30호) · 분황사화쟁국사비부(芬皇寺和諍國師碑趺,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분황사석정(芬皇寺石井,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호)
· 석등 · 건물지의 초석 등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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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 석탑(芬皇寺石塔)
국보 제30호 (지정일 : 1962년 12월 20일)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분황사
분황사 석탑은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0호로 지정되었다.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으로, 현존하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분황사 모전석탑이라고도 부르며,
원래는 9층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3층만 남아 있고 높이는 9.3m이다.
634년(선덕여왕 3) 분황사 창건과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임진왜란 때 크게 훼손되었다고 하며,
지금의 모습은 1915년 일본인들에 의해서 수리 복원된 것이다.
수리 당시 탑 안에서 사리함과 구슬 등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1단의 석축기단을 만든 다음, 그 중앙에는 1단의 화강암 판석(板石)을 밑에 깔고 안산암(安山岩)을
벽돌 모양으로 잘라서 탑신을 쌓아올렸다. 1층 4면에는 감실(龕室)을 만들고 그 좌우에 인왕상(仁王像)을
각각 1구(軀)씩 새긴 화강암을 끼웠다. 이 인왕상 조각은 당시 7세기 신라 조각양식을 살피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탑의 옥개(屋蓋)는 전탑(塼塔)을 닮아 상하에서 단층(段層)을 이룬다.
규모도 크지만 2층과 3층의 탑신이 1층에 비해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어 더욱 장중한 감이 느껴진다.
그 모양이 전탑을 따르고 있어, 백제 석탑이 목탑(木塔) 양식을 따르고 있는 것과 대조를 이루며,
신라 석탑의 발달사를 연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문화재이다.
[출처] 분황사 석탑 | 두산백과
▲ 분황사 석탑(芬皇寺石塔)
분황사 석탑(芬皇寺石塔)은 안산암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높이 9.3m의 모전석탑이다.
분황사 창건 당시 만들어진 석탑이 임진왜란 때 반쯤 파괴되었는데, 조선시대에 이 절의 중이
수리하려고 하다가 도리어 더욱 파손시켜 1915년 다시 수리를 하였다.
현재는 3층으로 되어 있으나 원래는 7층 혹은 9층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기단은 한 변 약13m, 높이 약l.06m로 크기가 제각기 다른 막돌로 쌓았다. 밑에는 상당히 큰돌을 쌓았고
탑신 쪽으로 갈수록 경사가 급해지고 있다. 기단 위에는 화강암으로 조각한 동물 한 마리씩을 네 모퉁이에
배치하였는데, 동해를 바라보는 곳에는 암사자, 내륙으로 향한 곳에는 숫사자가 있다.
현재 탑신부는 3층까지 남아 있으며, 탑신은 위쪽이 아래쪽보다 약간 좁다. 1층 네 면에는 입구가 열려 있는
감실을 만들어 놓았으며 입구 양쪽에 인왕상을 세웠다. 이 인왕상은 모두 반라이며 옷 무늬가 각기 다르다.
전체적으로 불법을 수호하는 신답게 막강한 힘을 느끼게 하는 조각으로 7세기 삼국시대의 조각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탑의 1층 네 면에 감실을 만든 것은 목탑의 뜻을 살린 것이다.
현재 감실 안에는 머리가 없는 불상이 놓여 있는데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2층과 3층은 1층에
비하여 높이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국보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다. 1915년 일본인들이 해체, 수리할 때
2층과 3층 사이에서 석함 속에 장치된 사리 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이때 발견된 병 모양의 그릇, 은합,
실패와 바늘, 침통, 금은제 가위 등은 경주박물관에 있다.
▲ 분황사 석정
지금도 관광객의 목을 축여주는 분황사의 우물은 신라시대에 만든 것이다. 우물의 겉모양은 팔각이고 내부는 원형이다. 외부의 팔각모양은 부처가 가르친 팔정도를 상징하며 내부의 원형은 원불(圓佛)의 진리를 상징한다.
전설에 따르면 이 우물에는 세 마리의 호국용이 살고 있었는데, 원성왕 11년(795)에 당나라의 사신이 이 우물 속에 사는 용을 세 마리의 물고기로 변하게 한 뒤 가져가는 것을 원성왕이 사람을 시켜 뒤쫓아가서 빼앗아왔다고 한다. 그 뒤 삼룡변어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금부터 천년 전에 만들어졌던 신라시대의 우물을 지금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남아있는 신라 우물 가운데에서는 가장 크고 우수한 것이다.
화쟁국사비편 우물 옆에 초라하게 남아 있는 비대좌는 고려 시대 때 만들어진 원효의 화쟁국사 비이다. 숙종6년(1101) 8월 원효와 의상이 동방의 성인인데도 불구하고 비석이나 시호가 없어 그 덕이 크게 드러나지 않음을 애석하게 여긴 숙종이 원효에게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우게 한 것이다.
그 뒤에는 방치되어 있었던 듯 비신을 받쳤던 비대가 절 근처에서 발견되자 김정희가 이를 확인하고 비대좌 위쪽에 '차신라화쟁국사지비적'(此新羅和諍國師之碑蹟)이라고 써놓았다.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으면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다.
▲ 분황사화쟁국사비부(芬皇寺和諍國師碑趺)
고려 숙종 때 원효 스님께 화쟁국사(和諍國師)를, 의상 스님께는 원교(圓敎)국사의 시호를 내렸다.
아울러 관련된 절에 비를 세워 그 공덕을 길이 보존케 하라는 어명이 있었다.
그 후 고려 명종 때 원효 스님이 출가한 절인 경주 분황사(芬皇寺)에 〈고려분황사화쟁국사비
(高麗芬皇寺和諍國師碑)〉를 세웠으나, 지금은 비석은 없어지고 귀부만 분황사 모퉁이에 서 있다.
이 추사의 글씨는 이 귀부에 새긴 글씨며, 글의 끝 월자는 趺 부자의 이체자가 아닌가 생각된다.
추사가 1817년 그의 나이 32세 때 무장사 비편을 찾기 위해 경주를 방문했을 때 새긴 것으로 추정되며,
여기의 靜 정자는 諍 쟁자를 잘못 알고 새긴 것 같다.
▲ 보광전(普光殿)
▲ 분황사약사여래입상 [芬皇寺藥師如來立像]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의 분황사 보광전에 모셔져 있는 이 불상은 모든 중생의 질병을 구제해 준다는
의미의 약사여래불이다. 원래 분황사에는 무게 30만 6700근의 동(銅)으로 만든 신라 최대의 불상인
약사여래좌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1998년에 불상이 있는 보광전을 고쳐 짓기 위해 해체하던 중 발견된 기록을 통해 분황사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탔으며 현재의 불상은 1609년에 동 5360근으로 만들었고 보광전은 1680년 5월에 다시 지은 것으로
밝혀졌다. 불상의 왼손 위에 놓인 약그릇 뚜껑 안쪽에 ‘건륭(乾隆) 39년 을미(乙未) 4월 25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건륭 39년은 을미년이 아니라 갑오년이기 때문에 이 기록을 사실대로 믿기는 어렵다.
불상의 얼굴은 둥글고 육감적이어서 세속적인 느낌을 주며, 때로는 어린이의 얼굴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두껍게 입고 있으며, 옷주름의 표현은 다분히 형식적이다.
손에는 약그릇을 들고 있어서 약사불임을 확인할 수 있다. 전체적인 조형기법과
보광전 보수시 발견된 기록을 종합해 볼 때 조선 후기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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