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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문무대왕릉(慶州 文武大王陵)

Big_Man 2012. 11. 21. 00:01

경주 문무대왕릉(慶州 文武大王陵)

 

사적 제158호 (지정일 : 1967년 7월 24일)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경북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해변에서 약 200미터 떨어진 바다에 있는 신라 제 30대 문무왕의

수중릉으로 사적 제 15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일명 대왕암 또는 대왕바위로도 불리고 있다.

 

문무왕은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내어 삼국통일을 완수한 군주이다.
위대한 업적을 남겼던 문무왕이 재위 21년만인 681년에 죽자 유언에 따라 동해구에 장사를 지냈다.
그의 유언은 불교의 법식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고문외정(庫門外庭)」에서 화장한 유골을 동해의 입구에 있는

큰 바위에 장사지냈으며 바위 안에는 수로를 만들어 바닷물이 통하게 하였다.

 

 

 

 

 

 

신라 30대 문무왕(재위 661∼681)의 무덤이다. 동해안에서 200m 떨어진 바다에 있는 수중릉으로,
신라인들의 창의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문무왕은 아버지인 태종 무열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의 침략을 막아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또한 병부, 창부 등 중앙관청을 창설하였고,
지방통치를 위한 5소경제도와 9서당 10정의 군사제도의 기틀을 마련하는 등 국가 체제 완성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대왕암은 자연 바위를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 그 안은 동서남북으로 인공수로를 만들었다.

 
바닷물은 동쪽에서 들어와 서쪽으로 나가게 만들어 항상 잔잔하게 하였다.
수면 아래에는 길이 3.7m, 폭 2.06m의 남북으로 길게 놓인 넓적한 거북모양의 돌이 덮혀 있는데
이 안에 문무왕의 유골이 매장되어 있을 것이라 추측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이 죽으면서
불교식 장례에 따라 화장하고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의 아들 신문왕은 동해 근처에 감은사를 세워 법당아래 동해를 향한 배수로를
만들어 용이 된 문무왕이 왕래할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문무대왕릉 → 경주 문무대왕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문무왕이 내린 보물, 만파식적(萬波息笛)”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어느 날 신문왕(문무왕의 아들)은 동해에 작은 산이 떠 있다는 보고를 받고서 점을 치도록 하였는데,
문무왕과 김유신 장군의 영혼이 나라의 평화를 위해 보물을 내려주고자 한다는 풀이가 나왔다.

 
왕이 사람을 보내 바다를 자세히 살피게 하니 산 위에 대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낮에는 둘이었다가
밤에는 합쳐져서 하나가 되더라고 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왕은 감은사에서 하룻밤을 묵었고,
이튿날 정오에 행차에 나섰다. 순간, 대나무가 하나로 합쳐지며 천지가 흔들리고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하더니 7일 동안 이어졌다.

 

날씨가 가라앉은 후 왕이 배를 타고 그 작은 산으로 들어가자 용이 나타나 검은 옥대를 왕에게
바치면서 말했다. “동해의 용이 되신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 장군께서 내리는 보물입니다”
왕이 대나무가 둘이었다가 하나가 되는 까닭을 묻자 용이 대답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
대나무도 합쳐질 때 소리가 나는 법이니 이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면 나라에 좋게 쓰일 것입니다”

왕이 대나무를 베어 뭍으로 나오자 작은 산과 용은 자취를 감추었다.

 

이후 이 피리를 불면 가뭄에 비가 오고, 홍수에는 비가 그치고,

파도가 가라앉고, 바람이 그치며, 병이 낫고, 적병이 물러갔다고 한다.
이에 세상의 근심거리를 없애고 평안하게 하는 피리라고 해서 ‘만파식적’이라 불렀다.

 

 

 

 

 

 

 

 

 

 

 

 

 

 

(2008년 10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