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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산(호암산) 호압사(虎壓寺)

Big_Man 2015. 7. 6. 21:08

 

 

 

■ 삼성산 호압사(虎壓寺) 가는 길

 

 

 

 

 

 

■ 호압사(虎壓寺) 소개 (출처 : 호압사 홈페이지)

 

[호암산 호압사] 호압사는 서울 금천구 시흥2동 234번지 삼성산에 자리잡고 있는 유서깊은 전통사찰이다.
곤악산의 주산이기도한 삼성산은 숲보다 바위가 많고 또한 그 바위들이 호랑이형상을 하고 있다하여

호압산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비보사찰 호압사] 전설에 전해지는 바와 같이 호압사는 비보사찰이라는 독특한 창건유래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조선 개국과 더불어 한양에 궁궐이 건립될 때 풍수적으로 가장 위협이 된 것은 관악산의 불(火)

기운과 삼성산(호암산)의 호랑이 기운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왕조에서는 이를 제압하기 위해 숭례문(남대문)에는 편액의 숭(崇)자 위의 외산(山)자를 불꽃이

타오르는 불화(火)의 형상으로 표현했고 또한 삼성산의 호랑이 기운을 누르기 위해 호랑이 꼬리부분에

해당하는 자리에 절을 창건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호압사 입니다.


이렇게 궁궐(경복궁)을 위협하는 호랑이 기운을 누르기 위해 창건되었다는 호압사는 18세기 전국 사찰의

소재와 현황, 유래 등을 기록한 가람고나 범우고에도 호랑이의 기운을 누르기 위한 비보(裨補) 개념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호압사는 불교 수행의 도량(道場)이면서도 풍수적으로는 호랑이의 기운을 누루기 위한 상징성 또한

함께 지니고 있는 사찰이며 조선왕조 1391(태조2)년 무학대사가 창건한 사찰입니다.

 

 

■ 호압사(虎壓寺)의 역사 (출처 : 호압사 홈페이지)

 

호압사가 창건된 데에는 두 가지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먼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금천조에는 지금의 시흥군의 현감을 지냈다고 하는 윤자(尹滋)의 이야기가 전한다. 이 기록에 의하면

"금천의 동쪽에 있는 산의 우뚝한 형세가 범이 걸어가는 것과 같고, 그런 중에 험하고 위태한 바위가 있는

까닭에 범바위(虎巖)라 부른다. 술사가 이를 보고 바위 북쪽에다 절을 세워 호갑(虎岬)이라 하였다....."라

하고 있다.

 

 

또 다른 전설로는 1394년(태조 3)을 전후해 조선의 도읍을 서울로 정하고 궁궐을 짓는 과정에서 일어난

이야기이다. 즉 태조가 서울에 궁궐을 세울 때 전국의 장인을 모아 진행했는데, 여러 차례에 걸쳐 밤만 되면

무너져버려 노심초사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어둠 속에서 괴물이 나타났는데 반은 호랑이고, 반은 형체조차

알 수 없는 이상한 동물이었다. 이 괴물은 눈으로 불길을 내뿜으며 건물을 들이받으려고 하였다.

이때 태조가 괴물에게 화살을 쏘라고 하였고, 화살은 빗발처럼 쏟아졌으나 괴물은 아랑곳없이 궁궐을

무너뜨리고 사라졌다.

 

태조가 침통한 마음으로 침실에 들었을 때 한 노인이 나타나 "한양은 비할 데 없이 좋은 도읍지로다"라며

멀리 보이는 한강 남쪽의 한 산봉우리를 가리켰다. 태조는 노인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호랑이 머리를 한

산봉우리가 한양을 굽어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노인에게 호랑이 모습을 한 산봉우리의 기운을 누를

방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노인은 "호랑이란 꼬리를 밟히면 꼼짝 못하는 짐승이니 저처럼 호랑이 형상을 한 산봉우리의 꼬리부분에

절을 지으면 만사가 순조로울 것입니다."하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 다음날부터 이곳에 절을 짓고

호압사(虎壓寺)라고 명하였다고 한다.

 

위의 두 설화는 공통적으로 풍수지리설과 비보사찰설이 가미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산의 모양을

호랑이로 본 것이며, 이를 누르기 위해 절을 창건했다는 이야기이다.

 

 

호압사의 창건기록으로는 호압사의 본사였던 봉은사에서 엮은 '봉은사 말사지'에서 볼 수 있는데 1407년인

조선태종7년에 창건하였다고 하며 또한 태종임금이 호압이란 현액을 하사하였다는 기록이있습니다.

그러나 1394년(태조 3)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이라는 관청을 두고 궁궐을 짓는 공사를

시작했고, 이듬해에 궁궐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호압사는『봉은본말지(奉恩本末誌)』의 기록보다는 태조

2년이나 3년 무렵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호압사의 역사는 이후 알려지지 않고 있다. 18세기에 전국 사찰의 위치와 연혁 등을 기록한 범우고(梵宇攷)나

가람고(伽藍攷)에도 호암사(虎巖寺) 또는 호갑사(虎岬寺)라 하여 간략하게 나올 뿐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그러다가 호압사는 1841년(헌종 7)에 이르러 중창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 의민(義旻) 스님 쓴

「경기좌도시흥삼성산호압사법당현판문(京畿左道始興三聖山虎壓寺法堂懸板文)」에 의하면 이 해에

당우가 퇴락한 것을 당시 상궁 남씨(南氏)와 유씨(兪氏)의 도움을 받아 법당을 고쳐지었다는 것이다.

 

 

고려 말 ·조선 전기의 스님으로 속성은 박씨(朴氏), 호는 무학(無學)·계월헌(溪月軒)이다.

삼기(지금의 합천) 출생으로 18세에 소지선사(小止禪師)의 제자로 승려가 되어 구족계를 받고,

혜명국사(慧明國師)에게서 불법을 배웠다. 진주(鎭州) 길상사(吉祥寺)·묘향산 금강굴(金剛窟) 등에서

수도하다가, 1353년(공민왕 2) 원(元)나라 연경(燕京)에 유학하여 그때 원에 와 있던 혜근(惠勤)과

지공(指空)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1356년 귀국하여 1373년에 왕사(王師)가 된 혜근의 법을 이어받았는데, 1376년 혜근이 회암사(檜巖寺)에서

낙성회(落成會)를 연 때 수좌(首座)로 초청하였으나 사양했다. 1392년 조선 개국 후 왕사가 되어,

대조계종사(大曹溪宗師)·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전불심인변지무애부종수교홍리보제도대선사

(傳佛心印辯智無碍扶宗樹敎弘利普濟都大禪師)·묘엄존자(妙嚴尊者)의 호를 받고 회암사에서 지냈다.

 

이듬해 태조를 따라 계룡산과 한양(漢陽)을 오가며 지상(地相)을 보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는 데 찬성하였다.

1397년(태조 6) 왕명으로 회암사 북쪽에 수탑(壽塔)을 세우고, 1402년(태종 2) 회암사 감주(監主)가 되었다가

이듬해 사직하고, 금강산 금장암(金藏庵)에 머물다가 입적하였다.

저서에 《불조종파지도(佛祖宗派之圖)》 《인공음(印空吟)》이 있다.

 

 

 

 

 

 

 

 

 

 

 

 

 

 

 

 

 

 

촬영 : 2015년 7월 4일(토) 서울둘레길 5 관악산코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