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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천년고도 경주관광[1부]

Big_Man 2011. 1. 24. 09:36


▲ 경주 불국사
ⓒ 빅 맨

2008년 10월 25일(토) 지인의 자녀 결혼식에 초대되어 서울에서 울산에 내려 갈 일이 생겼다.
먼 곳을 다녀와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유용한 여행이 될까 고심하다가 울산에서 가까운 신라의
천년고도 경주를 찾아 보기로 했다. 경주관광에 사용할 랜터카도 한대 예약하고, 하루 밤 묵을
콘도도 예약을 해 두고 10월 25일(토) 아침 5시에 집을 나섰다. 울산까지는 혼주가 마련한 결혼
식장행 관광버스를 타고 갔다.

결혼식이 끝난 뒤 랜터카를 타고 경주로 달렸다. 경주는 20여년전 산업시찰단의 일원으로 잠깐
다녀 온 기억이 전부다. 천년이나 흐른 신라의 숨결을 느껴보고 싶은데 어디를 먼저 가야 할까?
사전에 가보고 싶은 곳을 첵크는 하고 왔지만 현지 실정에 맞을지... 콘도에 도착하자마자 여장을
풀고 저녁식사도 뒤로 미룬채 경주관광 안내서 한부를 집어들고 첨성대로 향했다. 첨성대의
야경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 경주 첨성대(瞻星臺) - 신라 천문대



▲ 경주 첨성대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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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첨성대 입장권
■ 입장료 : 1,000원 ■ 주차료 : 2,000원(대릉원 주차장)



▲ 첨성대의 야경
ⓒ 빅 맨

첨성대(瞻星臺)는 국보 제31호로 경북 경주시 인왕동 839-1에 위치하고 있다. 이 첨성대는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647) 때 만들어진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 관측대이다.

화강석(花崗石)을 가공하여 조성한 기단(基檀) 위에 27단의 석단(石段)을 원통형의 곡선(曲線)
으로 쌓아 올리고, 그 위에 장대석(長大石)을 우물정자형(井)으로 축조하여 정상부에서 천문을
살피도록 시설되어 있다.

정남(正南)쪽의 석단에는 아래로부터 제13단과 제15단 사이에 네모난 출입구(出入口)가 있어
내부(內部)로 들어갈 수 있게 되어있고, 이 출입구 아랫부분 양쪽에는 사다리를 걸쳐
오르내리도록 되어있다.

이 곳을 통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하늘을 관찰했던 것으로 보인다. 규모는 밑면의 지름이 5.17m,
높이가 9.4m이며 지대석 한변의 길이는 5.35m이다. 신라시대의 석조물로 직선과 곡선이 잘
어울어진 안정감 있는 건축물이다.



▲ 경주 첨성대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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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첨성대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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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첨성대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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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첨성대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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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 27일(월)에 첨성대를 다시 찾았다. 야간에 느끼지 못한 새로운 느낌이다. 밤에는
잘 보이지 않던 주변의 릉이나 건물들과 비교하니 너무 작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천여년 전의
천문대라니 자부심과 함께 무한히도 커 보이지 않는가?



▲ 경주 첨성대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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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첨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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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첨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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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첨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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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 야경을 보고, 저녁식사를 하려고 식당을 찾는데 유난히도 순두부집이 많이 눈에 띄었다.
불국사 앞에서 제법 커보이는 '전통맷돌순두부' 식당으로 들어섰다. 늦은 시간이라서인지
손님은 없었다. 순두부를 주문하여 먹었으나 세상에 이렇게 맛없는 순두부는 처음 먹어 보았다.

10월 26일(일) 아침엔 분황사를 거처 감포쪽으로 일정계획을 세우고 먼저 분황사를 찾았다.


◆ 경주 분황사(芬皇寺)


▲ 경주 분황사
■ 입장료 : 1,300원 ■ 주차료 : 무료



▲ 분황사 입구(매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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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芬皇寺)는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에 있는 신라시대의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이다.

<삼국사기>에는 634년(선덕여왕 3) 정월에 창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는 석탑을
중심으로 남서쪽에 당간지주가 있고, 탑 북쪽에는 근래에 세운 보광전(普光殿)이 있다.

일찍이 원효는 이곳에 머물면서 〈화엄경소 華嚴經疎〉를 썼으며, <삼국유사>에 의하면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도〉가 있었고, 755년(경덕왕 14)에 강고내미(强古乃未)가 구리
30만 6,700근을 들여 약사여래상을 만들어 안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좌전(左殿)의 천수대비 벽화는 영험이 있어서 경덕왕 때 희명(希明)이라는 어린아이의
눈을 뜨게 했다고 전한다.

1101년(숙종 6) 숙종의 조서에 의해 한문준(韓文俊)이 화쟁국사비(和諍國師碑)를 건립했다.
그뒤 몽골 침입과 임진왜란 등으로 큰 손상을 입었다. 현존 당우로는 보광전·승당·종각이
있으며, 이밖에 분황사석탑(국보 제30호)·화쟁국사비편(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석정
(石井)·석등·건물지의 초석 등이 남아 있다.




▲ 분황사 9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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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황사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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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30호로 지정된 분황사 석탑(芬皇寺 石塔)은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313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

탑은 넓직한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착실히 쌓아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벽돌이 아닌 자연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네 모퉁이마다 화강암으로 조각된 사자상이
한 마리씩 앉아있다.

회흑색 안산암을 작게 벽돌모양으로 잘라 쌓아올린 탑신은 거대한 1층 몸돌에 비해 2층
부터는 현저하게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1층 몸돌에는 네 면마다 문을 만들고,
그 양쪽에 불교의 법을 수호하는 인왕상(仁王像)을 힘찬 모습으로 조각해 놓았다.

지붕돌은 아래윗면 모두 계단 모양의 층을 이루고 있는데, 3층 지붕돌만은 윗면이 네
모서리에서 위쪽으로 둥글게 솟은 모양이며, 그 위로 화강암으로 만든 활짝 핀 연꽃장식이
놓여 있다.

선덕여왕 3년(634) 분황사의 창건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백제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도 좋은 대조를 이룬다. 특히,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표현된 인왕상 조각은 당시 7세기 신라 조각양식을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수리된 이후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수리 당시 탑
안에서 사리함과 구슬 등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 분황사 석탑(芬皇寺 石塔) 사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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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황사 석탑(芬皇寺 石塔) 사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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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광전(普光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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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 약사여래입상(芬皇사 藥師如來立像)[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19호]은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312번지 분황사 보광전(寶光殿)에 모셔져 있으며 왼손에 들고 있는 건칠제
약그릇(乾漆製 藥盆)의 뚜껑 안쪽에 "건륭삼십구년을미사월이십오일조성야(乾隆三十九年
乙未四月二十五日造成也)"라는 붉은 글씨가 남아 있어 조선 영조(英祖) 50년(1774)에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불산의 얼굴은 둥글고 낮은 상투 모양이 표현된 머리에는 석회를 뭉쳐 만든 나선형 머리
카락을 부착하였으며, 옷은 양 어깨에 걸쳐 두껍게 처리하여 장대한 신체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대의 사이에는 화형으로 접고 띠를 두른 군의가 U자형으로 층단을 이루며 흘러내리다가 무릎
밑에 이르러 3단으로 접혀 있다.

대좌(臺座)는 아무런 조식이 없는 판석으로 대신하고, 불상 앞에 놓인 석재 불단은 사천왕상
(四天王像)이 새겨진 통일신라시대의 탑신석(塔身石)을 받침으로 산고 있다.

이 불상은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제작연대가 확실하여 불상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 분황사 약사여래입상(芬皇사 藥師如來立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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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황사 석정(芬皇寺 石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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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 석정(芬皇寺 石井)[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9호]은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312번지
분황사에 위치하며, 이 것은 호국룡변어정(護國龍變魚井)이라고도 불리는 신라시대 우물이다.

우물 틀의 외부는 높이 70cm의 8각이고, 내부는 원형인데 이것은 불교의 팔정도(八正道)와
원융의 진리를, 우물안에 4각형 격자는 불교의 근본교리인 시성체(四聖體)를 뜻한다.

『삼국유사, 三國遺事』에 보면 '원성왕(元聖王) 11년(795)에 당(唐)나라의 사신이 와서
신라의 호국용을 세 마리의 물고기로 변신시킨 뒤 잡아서 본국으로 떠났다.

그 하루 뒤에 두 여인이 원성왕 앞에 나타나서 자신들은 동지(東池), 청지(靑池)에 사는 두
호국용의 아내인데 당나라 사신과 하서국(河西國) 사람들이 자신이 남편과 분황사 팔각정
(八角井)에 사는 호국용을 주문을 외워 작은 물고기로 변화시켜 대나무통 속에 넣어 가지고
갔다고 하면서 이를 구해 달라고 호소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당아라 사신을 쫓아가서
물고기를 다시 빼앗아 각각의 우물에 놓아주어 다시 살게 하였다.'는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 분황사 화쟁국사비부(芬皇寺 和諍國師碑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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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 화쟁국사비부(芬皇寺 和諍國師碑趺)[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는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312번지 분황사에 위치하며, 이 비부는 고려시대에 세워진 원효대사(元曉大師)비의
받침돌이다.

비석은 고려 숙종(肅宗) 6년(1101) 8월에 내린 조서에 의해 분황사에 건립되었다. 숙종은 원효가
동방의 성인인데도 불구하고, 비석이나 시호(諡號)가 없어 그 덕이 크게 드러나지 않음을 애석
하게 여겨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유사(有司)로 하여금 비를 세우게
하였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비신을 받혔던 비대를 경내에서 발견하여 이를 확인 하였다.
현재 비대석에서는 "차신라화쟁국사지비적「此和諍國師之碑蹟)"이라고 쓴 김정희의 친필이
음각되어 있다.

비대는 직육면체이고, 상면에는 비신을 삽입하는 직사각형의 홈이 파져 있다.




▲ 분황사 감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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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 관광을 마치고 감포쪽으로 가는 길에 경주 보문관광단지를 잠시 둘러 보기로 했다.
보문관광 단지는 경주시가지에서 동쪽으로 약 10여 ㎞정도 떨어진 명활산 옛성터에 보문호를
중심으로 조성되었다.

총 242만평의 대지에 국제적 규모의 최고급호텔, 가족단위의 콘도미니엄, 골프장, 각종 수상
시설, 산책로, 보문호와 높이 100m의 고사분수 등 수많은 위락시설을 갖춘 경주의 사랑방
이라고 일컫는 종합관광 휴양지이다.



◆ 경주 보문관광단지


▲ 경주 보문관광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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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보문관광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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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보문관광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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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보문관광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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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보문관광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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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보문관광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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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관광단지를 지나 감포로 가는 길에 우뚝 솟은 경주탑이 발길을 잡았다.
이 곳이 『경주세계문화엑스포』공원이다. 계획에 없던 곳이라 아쉽지만 입장은 뒤로 미루고
잠시 겉 모습만 둘러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 경주세계문화엑스포 공원


▲ 경주 세계문화 엑스포공원
ⓒ 빅 맨


1998년 시작되어 경주의 문화, 나아가 한국의 문화를 세계에 알려온 국제화시대의 명품 문화
브랜드 『경주세계문화엑스포』. 특히 『경주세계문화엑스포 2007』은 전통과 첨단 속에
한국과 세계를 잇는 문화적 소통을 이뤄냈다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세계 최초의 음각건축물로 천년고도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된 「경주타워」, 신라의 신화적인
숲을 재현한 「신라 왕경(王京) 숲」, 우리의 대표적인 문화자산을 첨단기술로 재현한 3D 입체
영화 「토우대장 차차」.

2008년 4월 1일. 감동의 물결이 넘쳐났던 『경주세계문화엑스포』 바로 그 현장, 『경주세계
문화엑스포공원』이 단장을 마치고 한국 최고의 문화, 체험, 휴식공간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되었다.


■ 입장료 : 성인/5,000원, 청소년/4,000원, 어린이/3,000원


▲ 『경주세계문화엑스포』경주타워 조감도
ⓒ 출처 : 경주세계문화엑스포 홈페이지



▲ 『경주세계문화엑스포』경주타워
ⓒ 빅 맨



▲ 『경주세계문화엑스포』공원 조감도
ⓒ 출처 : 경주세계문화엑스포 홈페이지



▲ 『경주세계문화엑스포』문화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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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세계문화엑스포』신라왕경숲 조감도
ⓒ 출처 : 경주세계문화엑스포 홈페이지



▲ 『경주세계문화엑스포』공원 입구
ⓒ 빅 맨



▲ 『경주세계문화엑스포』공원 입구의 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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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감은사지(慶州 感恩寺址)


▲ 경주 감은사지ⓒ 빅 맨

■ 입장료 : 무 료 ■ 주차료 : 무 료


경주 감은사지(慶州感恩寺址) [사적 제31호]는 경북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55-1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감은사는 동해안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지금은 3층석탑 2기와 금당
및 강당 등 건물터만 남아있다.

신라 문무왕은 삼국을 통일한 후 부처의 힘을 빌어 왜구의 침입을 막고자 이곳에 절을 세웠다.
절이 다 지어지기 전에 왕이 죽자, 그 뜻을 이어받아 아들인 신문왕이 682년에 완성하였다.

문무왕은 “내가 죽으면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하니 화장하여 동해에 장사지낼 것”
을 유언하였는데, 그 뜻을 받들어 장사한 곳이 절 부근의 대왕암이며, 그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절 이름을 감은사(感恩寺)라 하였다고 전한다.




▲ 경주 감은사지
ⓒ 빅 맨


발굴조사를 통하여 강당·금당·중문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고, 금당 앞에는 동·서쪽에 두
탑을 대칭적으로 세웠음을 밝혔다. 이 건물들은 모두 회랑으로 둘러져 있는데, 이러한 배치는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금당의 지하에는 배수시설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죽은 문무왕이 바다용이 되어 이 시설을
통해 왕래하였다고 전해진다. 금당 앞의 탑 2기는 우리나라의 석탑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석탑의 모범이 되고 있다.

감은사는 황룡사, 사천왕사와 함께 나라를 보호하는 호국사찰로 알려져 있으며, 언제 절이 무너
졌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 감은사지 3층석탑
ⓒ 빅 맨


감은사지 3층석탑 [국보 제112호]은 동서로 마주 서 있는 이 탑은 신라 신문왕(神文王) 2년
(682)에 세워진 석탑이다. 화강암 이중기단 위에 세워진 방형(方形) 중층(重層)의 이 탑은 동서
양탑이 같은 규모와 구조를 보인다.

상층기단은 면석을 12매로, 갑석(甲石)은 8매로 구성하였다.탱주는 하층기단에 3주, 상층기단에
2주를 세웠다.

초층옥신(初層屋身)은 각 우주(隅柱)와 면석을 따로 세웠으며, 2층은 각면이 한돌, 3층은 전체가
한돌로 되었다. 목조가구(木造架構)를 모방한 형적을 보이며 옥개석 받침을 층단식으로 한
수법은 전탑(塼塔)의 전단계 모습을 추정케한다.

기단을 이중으로 하는 형식은 새로운 형식으로 이와 같은 양식은 이후로 한국 석탑의 규범을
이루는 것이 되었다.

또한 1960년 석탑을 해체 보수할 때 3층탑신에서 창건당시 설치하였던 매우 정교하고 귀중한
사리장치 (舍利裝置)가 발견되었으며, 보물 제366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전시
중이다. 탑의 전체 높이는 13.4m이다.



역시 경주는 신라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고도답게 볼거리가 너무 많다. 짧은 일정에도 모든 것을
보고 느끼고 싶은 심정이지만 어림없는 생각이다. 두고두고 돌아 봐야 될 곳이다. 감은사지를
보고나니 벌써 반나절이 지나가고 말았다.

이제 감포 바닷가로 나가 싱싱한 생선회라도 먹고 허기를 달래기로 했다.




▲ 감포의 은아회타운
ⓒ 빅 맨



▲ 감포 앞 바다풍경 - 멀리 대왕암(문무대왕릉)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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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포 앞 바다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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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포포 앞 바다풍경 (한 어부가 돌미역 농사를 위하여 바위를 닦고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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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포 앞 바다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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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포에서 조망한 봉길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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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포 은아회타운에서 늦은 점심식사를 마치고 문무대왕의 수중릉을 볼 수 있다는 봉길해수욕장
으로 향했다. 감포에서 봉길해수욕장은 지척에 있다.



◆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은 양북면 봉길리 해변에서 약 200미터 떨어진 바다에 있는 신라 제30대
문무왕의 수중릉으로 사적 제 15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일명 대왕암으로도 불리고 있다.

문무왕은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내어 삼국통일을 완수한 군주이다.
위대한 업적을 남겼던 문무왕이 재위 21년만인 681년에 죽자 유언에 따라 동해구에 장사를 지냈다.

그의 유언은 불교의 법식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고문외정(庫門外庭)」에서 화장한 유골을 동해의 입구에 있는
큰 바위에 장사지냈으므로 그 뒤 이 바위를 대왕암 또는 대왕바위로 부르게 되었다.

대왕암(大王岩)은 삼국 통일이라는 위업을 완성한 신라 제30대 문무대왕(재위: 661~681)의
바다무덤 (海中陵)이다. 대왕암은 바닷가에서 200미터 떨어진 곳에 약 20미터의 바위섬으로 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에 조그마한 수중(水中)못이 있고 그 안에 길이 3.6미터, 너비 2.9미터,
두께 0.9미터 크기의 화강암(花崗岩)이 놓여 있다.

"내가 죽으면 화장(火葬)하여 동해에 장례하라. 그러면 동해의 호국룡(護國龍)이 되어 신라를
보호 하리라."라는 대왕의 유언에 따라 불교식 장예법으로 화장하여 유골을 이곳에 모셨다고
전한다.

대왕암은 가까이 있는 이견대(利見臺), 감은사(感恩寺)와 깊은 관계가 있으며 문무대왕의
거룩한 호국 정신이 깃들인 곳으로 이런 형태의 능은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다.

한편 여기를 문무대왕의 유골을 뿌린 곳(散骨處)이라고 보는 이도 있다.




▲ 봉길해수욕장에서 바라 본 문무대왕릉(대왕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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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무대왕릉(대왕암)은 갈매기의 낙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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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왕암(문무대왕릉) - 대왕암에 비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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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 봉길해수욕장은 경주시에서 동쪽으로 32km 떨어진 대종천 하구에 자리한 백사장 길이
800m, 폭 20~60m로 개장시 평균 수온은 섭씨 22도 가량 된다. 앞에는 신라 문무대왕의 해중릉인
대왕암이 있으며, 가까운 곳에 감은사, 이견대, 기림사, 선무도의 본산 골굴사, 고유섭 시비,
용연 등의 알려진 명소가 많다. 여름에는 경주 관광 후 해수욕을 즐길수 있다.




▲ 봉길해수욕장
ⓒ 빅 맨



▲ 봉길해수욕장
ⓒ 빅 맨



▲ 봉길해수욕장의 오징어 건조
ⓒ 빅 맨



▲ 봉길해수욕장의 오징어 건조
ⓒ 빅 맨


다음은 이 곳 봉길해수욕장을 떠나 장항리오층석탑을 보고 안압지의 야경을 구경할 계획으로
서둘러 출발했다. 벌써 태양은 서산으로 기울고 있다.

일몰에 쫒겨 급하게 장항리로 가는 길목에 『경주허브랜드 식물원』이 눈에 띄었다.
허브농원은 어느 지방에나 산재되있어 경주까지 와서 허브농장을 구경할 필요는 없겠지만
장항리오층석탑에 도착하면 너무 늦을 것 같아서 계획을 변경하여 허브식물원을 돌아 보고 바로
안압지로 가기로 했다.



◆ 경주허브랜드 식물원


▲ 경주허브랜드 식물원 입장권

■ 입장료 : 2,000원 ■ 주차료 : 무료(도로변 주차)



▲ 경주허브랜드 식물원 입간판
ⓒ 빅 맨



▲ 경주허브랜드 식물원 야외정원
ⓒ 빅 맨



▲ 경주허브랜드 식물원 야외정원
ⓒ 빅 맨



▲ 경주허브랜드 식물원 야외정원
ⓒ 빅 맨



▲ 경주허브랜드 식물원 야외정원
ⓒ 빅 맨



▲ 경주허브랜드 식물원 야외정원
ⓒ 빅 맨



▲ 경주허브랜드 식물원 - 남천
ⓒ 빅 맨



▲ 경주허브랜드 식물원 - 한련
ⓒ 빅 맨



▲ 경주허브랜드 식물원
ⓒ 빅 맨



▲ 경주허브랜드 식물원
ⓒ 빅 맨



▲ 경주허브랜드 식물원
ⓒ 빅 맨


경주허브랜드에서 경주시내로 들어와 저녁식사는 뒤로 미루고 임해전지(안압지)로 향했다.
안압지의 야경을 보기 위해서다. 육안으로 보는 야경은 참으로 아름다웠으나 카메라에 그
아름다움을 모두 담을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신라의 천년고도 경주』관광은 제2부에 계속됩니다.

2011년 1월 23일 빅 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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