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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한(哀恨)이 서린 소록도

Big_Man 2010. 2. 24. 20:28


소록도(小鹿島)는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에 딸린 섬으로 한센병 환자를 위한 국립소록도병원이 들어서
있는 섬으로 유명하다. 전남 고흥반도의 끝자락인 녹동항에서 1㎞가 채 안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섬의 모양이 어린 사슴과 비슷하다고 하여 소록도(小鹿島)라고 불리운다.

과거 한센병 환자들의 애환이 깃들어 있는 섬이지만, 현재는 700여명의 환자들이 애환을 딛고 사랑과
희망을 가꾸고 있다.


여행팁!

소록도 인근에는 둘러볼 만한 관광지가 많이 있어 조용하고 시원한 여름휴가를 보내기에 좋다.

녹동항에서 운항되는 유람선을 이용하면 추위가 느껴질 정도로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활개바위,
거북바위 등 갖가지 기묘한 바위들과 함께 다도해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으며, 인근에 있는 나로도
해수욕장은 완만한 해안선과 얕은 수심으로 가족휴양객들의 피서지로 적격이다.

또한 녹동에서 승용차로 5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한 팔영산자연휴양림을 찾으면 산과 계곡, 일출의
장관을 즐길 수 있고,숙박시설로 휴양림내 산막시설을 이용할 수도 있다. 돌아오는 길에 고흥의
특산물인 유자나 마늘, 김 등을 구입하는 것도 좋다. (자료출처 : 한국관광공사)






▲ 소록도 위치도 (출처: 고흥군 홈페이지에서)


고흥반도를 가로질러 녹동항 부둣가에 서면 600m 전방에 작은 사슴처럼 아름다운 섬 '소록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섬의 면적은 4.42㎢에 불과하지만 깨끗한 자연환경과 해안절경, 역사적 기념물
등으로 인해 고흥군의 새로운 관광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그동안 녹동항에서 소록도까지는 15분 간격으로 선박이 운항되었지만, 2009년 3월 21일 소록대교가
개통되어 이제 소록도는 육지가 된셈이다.





▲ 녹동항에서 바라 본 소록대교 ⓒ 빅 맨








▲ 녹동항에서 바라 본 소록대교 야경 ⓒ 빅 맨




▲ 녹동휴게소에서 바라 본 녹동항 ⓒ 빅 맨




▲ 녹동휴게소의 전망대 ⓒ 빅 맨




▲ 녹동휴게소에서 조망한 소록대교 ⓒ 빅 맨




▲ 녹동휴게소에서 ⓒ 빅 맨




▲ 국립소록도병원 앞에서 조망한 소록대교 ⓒ 빅 맨




▲ 哀恨의 追慕碑 ⓒ 빅 맨


◆ 추모비 안내 ◆

소록도병원은 1916년 일본 총독부 영에 의해 개원되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원생들은
자치권을 요구했고, 이를 거부하는 자들에 의해 협상대표자 84명이 처참하게 학살을 당했습니다.

그 날이 바로 1945년 8월 22일 이었습니다.

참사 56년만인 지난 2001년 12월 8일에 화장, 매몰된 현장에 전원생 및 언론기관과 관심있는 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유골발굴 작업을 실시하여 다수의 유골을 발굴 하였습니다.

우리는 학살당했던 현장에 추모비를 세워 84명의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음과 지구상에 있는 한센 가족에
대한 이해와 온전한 인권 회복을 소원하는 상징적인 기념비를 2002년 8월 22일에 건립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소록도를 아끼시고 한센병에 대하여 깊은 이해를 가지신 여러분들께 다시는 이 세상에 이 같은
죄악이 저질러지지 않기를 기도해 주시고 숙연한 마음으로 추모해 주시기 바랍니다. (2002. 8. 22)







▲ 소록도의 애한을 머금고 곱게 핀 목련 ⓒ 빅 맨




▲ 국립소록도병원 ⓒ 빅 맨


국립소록도병원(國立小鹿島病院)은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 소록1리에 위치한 나환자의 치료 및
연구를 위해 설립된 국립특수의료기관이다.

국립소록도병원의 역사는 1916년 일본 명치천황이 하사한 기금으로 설립된 소록도 자혜의원에서
시작되는데, 이 병원은 당시 조선 내의 유일한 한센병 전문의원이었다.

자혜의원은 1936년 소록갱생원으로 바뀌었으며, 해방 후인 1949년 다시 중앙나요양소로 개칭되었다가
1957년에는 소록도갱생원, 1960년 국립소록도병원으로 각각 개칭되었다.

이후 1968년 국립나병원으로 개편되어 발전하다가 1982년 국립소록도병원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국립소록도병원의 임무는 정부시책에 의한 국민보건 향상의 일환으로 나환자의 전문진료, 수용보호와
복지증진, 정서생활 지도, 음성치유자의 사회복귀를 위한 자활능력배양과 나병에 관한 조사연구를
실시하여 나병의 조기 퇴치에 기여하는 데 있다.




▲ 국립소록도병원/개원50환년기념비 ⓒ 빅 맨




▲ 국립소록도병원의 동백 ⓒ 빅 맨






▲ 소록도의 ??나무 ⓒ 빅 맨




▲ 국립소록도병원 중앙공원 안내도 ⓒ 빅 맨


이곳의 중앙공원은 1936년 12월부터 3년 4개월 동안 연인원 6만여 명의 환자들이 강제 동원되어
19,834.8m²(6천평) 규모로 조성되었다. 지금도 공원안에 들어서면 환자들이 직접 가꾸어 놓은 갖가지
모양의 나무들과 함께 전체적으로 잘 정돈된 빼어난 조경이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그리고 공원 곳곳에는 환자들의 아픔을 간직한 역사기념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공원 입구에는
일제 때의 원장이 이곳에 수용된 한센병 환자들을 불법감금하고 출감하는 날에는 예외없이 강제로
정관수술을 시행했던 감금실과 검시실이 있다. 이 검시실 앞에는 25세 젊은 나이에 강제로 정관수술을
받은 환자의 애절한 시가 남아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또한 소록도병원의 역사와 환자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갖가지 자료가 전시된 생활자료관에서는
한센병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함께 인간의 존엄성을 다시 한번 생각게 한다.

이 밖에도 공원내에는 나환자 시인 한하운의 보리피리 시비, 일본인이면서 조선 환자들을 가족처럼
아껴주며 헌신적으로 보살핌으로써 소록도의 슈바이처라 일컬어지는 '하나이젠키치 원장'의 창덕비,
그리고 “한센병은 낫는다” 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 구라탑 등 환자들의 애환과 박애정신을
엿볼 수 있는 기념물들이 세워져있다.

섬내에는 울창한 송림과 백사장이 잘 어우러져 있는 소록도해수욕장이 있어 병원 방문과 연계하여
하루를 보내기에 적합하다. 주의할 점은 섬 내에서는 숙박이 금지돼 있어 저녁 6시 이전에 반드시
육지로 돌아와야 한다.






▲ 감금실(監禁室) 전경 ⓒ 빅 맨




▲ 감금실(監禁室)의 문화재 등록명패 (등록문화재 제67호) ⓒ 빅 맨




▲ 감금실(監禁室) 안내판 ⓒ 빅 맨


◆ 감금실(監禁室) 안내 ◆

감금실(監禁室)은 1935년 제정된 조선나예방령(朝鮮癩豫防令) 제6조 및 동법 시핼규칙 제8조의 규정에
따라 설치된 일제강점기 인권탄압의 상징물이다.

붉은 벽돌과 육중한 담으로 둘러쌓여 있으며, 남(南)과 북(北) 두 건물이 회랑(回廊)으로 연결된 H자
형태로 방은 철창이 설치되어 있고 각 실의 한쪽 마루바닥을 들어 올리면 변기가 나오는 형무소와
유사한 구조로 되어 있다.

1935년 제정된 조선나예방령에 의하여 한센환자는 직업의 자유와, 거주이전의 자유, 이동권을 박탈
당하였으며, 수용 환자들은 원장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변론의 기회조차 없이 이곳에서 감금(監禁),
감식(減食), 금식(禁食), 체벌(體罰) 등의 징벌을 받아야 했고, 강제노역이나 온갖 가학(加虐)에도
굴종케 하고, 부당한 요양소 운영에 대한 저항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장소로 활용되었다.

일제 말기에는 부당한 처우와 박해에 항거하던 환자들이 무수히 이곳에서 사망하거나 불구가 되었으며,
출감시에는 예외없이 정관절제(精管切除)를 당하였다고 한다.

해방 이후 한동안 이곳은 격리실 또는 보호실로 불리었으며, 1973년 이후 내부를 일부 개조하여
신체부자유자의 가정사로 잠시 사용되기도 하였다.

2004년 2월 6일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67호로 등록되었다.





▲ 일제하 한센병 환자 징계검속권 ⓒ 빅 맨




▲ 감금실 담쟁이 ⓒ 빅 맨




▲ 시(詩) : 감금실(監禁室)/김정균 ⓒ 빅 맨


위의 시(詩) 감금실은 검시실 내벽에 붙여진 것으로 한센인 김정균이 쓴 한맺힌 시(詩)다.




▲ 소록도의 모란꽃 ⓒ 빅 맨






▲ 검시실(檢屍室) 안내판 ⓒ 빅 맨


◆ 검시실(檢屍室) 안내 ◆

검시실(檢屍室) 또는 해부실(解剖室)로 불리는 이 건물은 1935년에 건립되었으며, 두칸으로 나뉘어져
있다. 앞 부분의 방은 주로 사망환자의 검시를 위한 해부실로 사용되었으며, 뒤쪽의 방은 정관절제
(精管切除)를 집행했던 곳이었다.

모든 사망자는 본인 및 가족의 뜻과는 전혀 관계없이 이곳에서 사망원인에 대한 해부절차를 마친 뒤
간단한 장례식을 거쳐 섬 내 화장장에서 화장 후 납골당에 유골로 안치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보고 소록도의 환자들은 "3번 죽는다"라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 첫번째는 한센병 발병이요, 두번째는 죽은 후 시체 해부요, 세번째는 장례 후 화장이다.

정관절제는 한센병 환자의 근절을 위해 1927년 일본의 한센병 연구 의학자에 의해 제기되었는데,
병원 당국에서는 개원이래 남녀 환자 별거를 실시해 오던 것을 1936년부터 정관절제를 할 경우에
부부 동거를 허용하였다.

그러나 정관절제는 감금실에 수용되었다가 출감하는 환자들에 대해서도 그 벌칙의 하나로 행해졌다.

2004년 2월 6일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66호로 지정되었다.





▲ 검시실의 해부대 ⓒ 빅 맨




▲ 검시실의 단종대(斷種臺) ⓒ 빅 맨




▲ 시(詩) : 단종대(斷種臺)/이 동(李 東) ⓒ 빅 맨


위의 시(詩) 단종대(斷種臺)는 검시실 내벽에 붙여진 것으로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제4대 수호
(周防正季) 원장시절 그의 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감금실에 감금되었다가 풀려나면서 강제로 단종
(정관절재)수술을 받은 당시 25세의 한센인 이동(李東)이 쓴 한맺힌 시(詩)다.




▲ 소록도의 민들레꽃 ⓒ 빅 맨




▲ 전시실 입구의 기록사진 ⓒ 빅 맨






▲ 전시실 내부의 생활도구 전시품들 ⓒ 빅 맨






▲ 전시실 내부의 의료용품 등 전시품들 ⓒ 빅 맨






▲ 중앙공원의 동백 ⓒ 빅 맨






▲ 중앙공원 ⓒ 빅 맨




▲ 개원제40주년 기념비 ⓒ 빅 맨




▲ 수호(周防正季)원장 동상 안내판 ⓒ 빅 맨


◆ 수호(周防正季)원장 동상 안내 ◆

수호(周防正季)원장은 1933년 9월 1일부터 1942년 6월 20일까지 8년 9월동안 제4대 원장으로 재직한
일본인으로서 온갖 강압적인 수단으로 환자들을 동원하여 소록도 내의 각종 공사를 추진하였다.

또한, 환자들로부터 기금을 강제 징수하여 1940년 8월 20일 자신의 동상을 세웠는데 이날을 기념하여
매월 20일을 「보은 감사일」로 지정하고 환자들로 하여금 참배하게 하였다.

수호원장은 환자들에게 강제노역, 가혹행위 등으로 환자들의 불만을 사던 중 1942년 6월 20일 감사일
행사에서 환자 이준상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준상은 당시 일제의 법원에 의해 사형에 처해졌으며
원장 동상은 태평양전쟁 물자로 징발 철거되었다. 수호원장 동상의 자체 높이는 3.3m 였으며,
단을 포함한 전체 높이는 9.6m 였다.





▲ 국립소록도병원 중앙공원 ⓒ 빅 맨




▲ 중앙공원 ⓒ 빅 맨




▲ 국립소록병원 중앙공원 ⓒ 빅 맨




▲ 중앙공원 ⓒ 빅 맨






▲ 중앙공원 ⓒ 빅 맨




▲ 중앙공원 ⓒ 빅 맨








▲ 중앙공원의 오토메동백 ⓒ 빅 맨




▲ 국립소록병원 중앙공원의 돈나무 ⓒ 빅 맨




▲ 국립소록병원 중앙공원 ⓒ 빅 맨




▲ 국립소록병원 중앙공원 ⓒ 빅 맨




▲ 국립소록병원 중앙공원 ⓒ 빅 맨




▲ 국립소록병원 중앙공원의 황금편백 ⓒ 빅 맨






▲ 국립소록병원 중앙공원의 등나무 ⓒ 빅 맨




▲ 국립소록병원 중앙공원의 공적비 ⓒ 빅 맨








▲ 소록도의 구나탑(救癩塔) ⓒ 빅 맨


[구라탑(救癩塔)의 유래] 서기 1963년 8월 1일 국제 웍 캠프단 133명이 오마도간척공사를 도와
근로봉사를 하며 하루속히 한센병이 근절되기를 기원하면서 이 탑을 건립함. (서기 1963년 8월 23일)



◆ 오마도(五馬島) 간척공사란?

오마도(五馬島)는 해안을 낀 다섯 개의 섬(고발도, 분매도, 오마도, 오동도, 벼루섬)을 연결한
모양이 말(馬)의 형태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추진배경 : 고흥 출신 국회의원 손문경이 조창원 원장에게, '이 공사가 환자들의 자활 정착사업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 것이 계기가 되었는데, 그 당시 음성치유자들의 사회 복귀를 위한
        정착사업을 추진하려던 정부 정책과 명분이나 시기가 일치하여 추진할 수 있었다.

▣ 공사개요 :
   ● 매립면적 : 1,070㏊
   ● 공사규모 : 고흥군 도양면 봉암반도와 풍양반도에서 각각 오마도와 오동도를 연결하는 둑을 쌓아
            농지 조성
   ● 방 조 제 : 3개소 2,753m(1호 843m, 2호 350m, 3호 1,560m)
   ● 공사기간 : 1962. 7. 10. ∼1988. 12. 29.
   ● 총사업비 : 12,951,000,000원

▣ 추진목표 : 1천 정보(330만평, 소록도의 2배 정도 크기)의 농토 조성으로 5만석(2,500여톤)의
        양곡 생산과 음성치유자 1천5백세대(2,500여명)가 정착할 수 있는 터전 마련.

▣ 추진경과 :
   1962. 7. 10. 기공식
   1963. 8. . 국제워크캠프단 133명, 25일간 공사 참여, 나주 호혜원, 현애원에서도 한달간 근로대 지원
   1963. 12. . 1·2·3호 방조제, 바다 속으로 침강
   1964. 7. 25. 사업 주체가 전라남도로 이관됨.
   1964. 11. 1. 보건사회부 자조근로사업장 책정
   1977. 1. 31. 농림수산부 미완공 간척사업지구 책정
   1988. 12. 29. 완공


한센병 치유와 일반인이 함께 하는 이상적인 농촌 건설과 약 2,500여 톤의 양곡 생산이 기대되었던
오마도 간척공사는 '내가 살 땅을 내가 만든다'는 소록도 원생들의 벅찬 꿈을 안고 추진되었다.
인근 주민들의 반발 등 현실적인 여건들과 부딪히게 되었고, 언론마저 점차 '오마도 간척공사의
진행이 어렵다'는 내용으로 보도하기 시작하였다.

여러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면서 애쓴 원생들의 기대와 관계없이 1964년 7월 25일 결국 사업주체가
전라남도로 넘어가고 말았으며, 1964년 11월 마침내 "나환자들 정착 안시키겠다!"라는 결정이 알려졌다.

실의에 빠진 원생들은 집권당인 공화당에 "공사가 넘겨지게 된 경위를 밝혀달라"는 요지의 청원서를
보냈으나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다.

그리고 오마도는 끝내 피와 땀의 보람도 없이 [당신들의 천국]으로 남아, 지금도 바다 건너 소록도를
바라보고 있다.








▲ 중앙공원의 황금편백 ⓒ 빅 맨






▲ 국립소록병원 중앙공원 ⓒ 빅 맨





  배경음악을 잠시 정지(■)시키고 맨아래 플레이어를 작동(▶)하여 소록도 노래를 들어 보자!




배경음악 : 보리밭/윤용하 작곡, 박화목 작사




♣ 소 록 도 ♣

이장순. 김정호 작사 / 김정호 작곡 / 이장순 노래



< 1 >

누가 가는 곳인가 누가 사는 곳인가
한 시인 파랑새 되어 눈물 짖는 곳

사랑도 행복도 한 순간 꿈이련가
저녁 연기 피어 올라 어둠이 오면
아~ 소록도 고운 섬에 눈물의 꽃이 지네


< Narr >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그 숨 막히는 더위 속을 절름 거리며 걷던 님..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고,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가도 가도 천리

장성 못재 너머 먼~ 전라도 길을
피 울음으로 걸었던 시인(詩人),

누운 돌에 새겨 놓은 보리 피리,
아기 사슴 같은 고운 섬은
그의 시(詩)가 살아 있어 더욱 애절하다.


< 2 >

꽃은 다시 피려나 님은 다시 오실까
기약도 못 하고서 흘러 왔던 곳

파도는 저 혼자도 밀려 오는데
새벽 바람 물결 위로 잠을 깨우면
아~ 소록도 슬픈 섬에 물새도 울고 가네

아~ 소록도 고운 섬에 눈물의 꽃이 지네





소록도 : 이장순.김정호 작사/김정호 작곡/이장순 노래